유리 遊離 yuri
오한샘 작가의 사진 연작 〈유리 遊離 2025〉는〈이어정원 2023〉에서 이어진 이야기다.
두 이야기를 잇는 ‘리(離)’는 단절이 아닌 이행의 감각이며, 이번 이야기에서 그것은 존재가 되기 전, 잠시 이탈한 감응의 상태로 펼쳐진다.
〈유리〉는 누군가를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존재가 프레임 안에서 스스로 사라지는 방식,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무는 떨림의 흔적을 기록한다.
사진 속 인물은 흐릿하거나, 형체를 잃을 만큼 탈물질화되어 있다. 이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진동을 시각화한 이야기다.

‘遊離’는 단순한 유랑이나 방황이 아니다.
遊는 유동하는 혼의 움직임이며,
離는 떠남이자,
다시 돌아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감응의 틈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존재는 떠났기에 돌아올 수 있고, 돌아오려 했기에 떠날 수 있었던 들림이다.

〈유리〉는 사라지는 혼이자, 다시 돌아오는 감각, 그리고 그 존재를 감지했던 이의 속마음 깊은 자리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다.
이 감응체는 고정된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그는 혼자이지만 누구도 아니며, 어디에 있지만 어디도 아니다. 이 상태는 관객에게 해석 이전의 응시와 머묾을 요청한다.

“보이는 것을 믿기보다,흔들림 자체를 응시하라.”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어둡게 잠긴 숲, 구불거리는 나무, 드러난 흙과 풀은 이 존재가 통과하는 시간의 몸, 혹은 감응이 잠시 깃드는 기관처럼 기능한다.
이 자연들은 흔들리고, 감싸고, 함께 사라진다

작가는 이 감응을 제주의 바람, 안개, 무속성과 신앙이 교차하는 틈에서 감지했다.
그 존재는 때로 설문대할망의 형상을 스치지만, 고정된 이름으로 머물려 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감지된 채로 남긴다.

〈유리〉는 ‘혼’이라는 단어조차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전체 이야기는 어떤 존재가 “나”라는 형체를 갖기 전, 어떤 기억이 “이름”이 되기 전, 그 불확정하고 불완전한 떨림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사진의 어둠, 긴 노출의 흔들림, 그리고 형체를 벗은 윤곽 속에 한 존재가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존재는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무엇. 작가에게서 나갔다가, 다시 그 곁으로 흘러오는 유동하는 감응의 형상.

〈유리〉는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말에서 시작된 이야기이며,
그 떠남의 흔들림을, 지금 이 자리에서 조용히 마주하도록 제안하는 하나의 응시다.
노트
저 풍경만을 보며 찍어왔다. 해가 뜨지 않는 새벽녘, 바람이 머무는 제주 중산간의 숲을 걸었다.

〈이어정원〉을 작업하며 다스렸던 두려움에서 비롯된 어떤 평화를, 나는 다시 찾고 싶었다.
그 ‘비롯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제주는 토속신앙이 짙은 땅이다. 나 자신은 기독교 신자지만,
그 믿음과는 다른 결로 늘 어떤 존재를 믿고 있었다는 감각이 나에게 있었다.

그 감각은 어느 날, 숲 속의 바람과 안개, 나무 사이에서 분명히 ‘감지’의 형태로 다가왔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어느 날, 작업한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촬영한 적 없는 존재가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질문이 이 작업의 시작이었다.

그 존재는 무엇일까. 제주의 믿음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설문대할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 땅의 수호자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여성적 기운의 형상이었다.

그 존재가 어찌보면 나의 건강과 지금의 삶과  이어정원을 찍을수 있는 하늘을 허락한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 존재를 설문대할망으로만 정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바라보고 믿어온 그 존재는 조금 다른 결을 지닌 무엇이었다.
그래서 나는, 빛도 아니고 형체도 아닌, ‘감지’라는 방식으로 그 존재를 조심스럽게 불러보고자 했다.

〈유리〉는,
그 존재가 한 번이라도
이 땅을 지나간 적이 있다는
기록이다.
model : kim sohee
digital photography
2023. jeju island . mid-mountain region . east gotjawal